썰/삶의미각

나비의 속눈썹같이.

uoooooc 2012. 8. 15. 23:06

그녀가 흰 광목 천을 가위로 주욱 잘라서 준다. 어른 둘이 덮으면 될 만한 크기.

가늘고 작은 바늘에 녹색 실을 꿰어 밑단을 홈질로 꿰매는데 40분이 걸리더라. 그녀 말에 의하면 이런 저런 일과 얘기를 하면서 바느질해서 그렇단다.

이런. 시간이 너무 소요되네.

맞은 편의 천을 무릎에 펴 놓고 앉아 시간을 보면서 꿰맸다. 두 번째는 25분 정도.

또 꿰미실래요?

아뇨.

오늘 밤에 저 천을 삶아 놓을께요.

조금만 누웠다 일어나도 될까요?

홈질을 하며 일부러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니 낮 2시와 3시 사이에는 내가 뒤로 넘어갈 지경으로 어지러워 하는 시간대이다.

머리 속의 피가 하나도 없는 듯 하얗게 뻑뻑해지는데, 그 묘한 아픔은 누워서 눈을 좀 감고 있으면 회복이 된다.

20여분 정도 바닥에 천을 개켜 베고 옆으로 누웠다. 아득하게 까라진다. 20여분 눈을 감고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눈을 뜨고 보니 그녀가 나를 향해 묻는다.

뭐 하실래요? 재밌죠? 사경 하실래요?

뭐길래요?

법화경이요.

그녀가  쓴 것을 들여다보았다.

사경을 해 보지요. 근데 내가 써도 되나요?

괜찮아요. 누가 쓰던 모두가 같은 마음일텐데요.

무릎에 211한글자의 한자를 먹물에 묵혀 세필로 덧 씌운다고 할지, 법문 위에 직접 베껴서 쓴 글이 보인다.

옆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왔다 갔다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나와 아이들에게 계속 말을 걸고

선풍기는 다른 방향으로 돌고 있어서 무더웠지만 책상이 없는 공간, 그래서 내 손 가방에 올려놓고 무릎은 거의 꿇은채 써내려갔다.

이런 것을 한다고 잊혀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잊어질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조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온갖.

온갖 기억들이 온갖 음성들이 온갖 장면들이 온갖 말들이 뒤엉겨 글씨가 기를 잃은 채 날아간다.

내 심정은 어쩔 줄 몰라한다.

그녀는 나를 정착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바느질을 하게 하고 사경을 하게 하고 열쇠를 어디 어디에 둘테니 언제나 오시라고 한다든지

나를 빤히 쳐다보며 30년은 더 갈 수 있어요라고 한다든지

그죠? 재밌죠? 를 연발하면서 내가 둥둥 떠다니는 것을 잡아주려 한다.

지금 일하러 가야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곳을 뒤로한 채 빠져나오면서

그녀의 집은 서민들의 골목길 속에서 마치 100년 전의 그 집처럼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차는 일하러 가는 곳으로 향하지 않고 청암으로 들어갔다.

매미 소리가 이젠 잦아든다.

살만큼 산, 할 일을 어느정도 했음을 수긍하는 것인지 매미소리가 낮게 가라앉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청암의 거실은 내가 나갈 때의 상태 그대로이다.

다만 행복의 나무가,  가지와 잎을 거실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있고

설겆이를 마저  끝내지 못한 그릇에 오래된 수도물 흔적이 남아있었다.

자리에 앉아 컴을 켜고 몇가지 자료들을 올려놓고

컴에 접속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간, 나는

내 심장을 시커멓게 쥐어짜는

충격에

주저앉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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