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1

굼뜨고 어리석으며 둔한 사랑

uoooooc 2013. 3. 8. 23:46

 

 

조용한 시절(時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신 사랑이 생기었다

굵다란 사랑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우스운 이야깃거리다

다리밑에 물이 흐르고

나의 시절은 좁다

사랑은 고독이라고 내가 나에게

재긍정(再肯定)하는 것이

또한 우스운 일일 것이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白骨)이 생기었다

생활의 백골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무서운 이야깃거리다

다리 밑에 물이 마르고

나의 몸도 없어지고

나의 그림자도 달아난다

나는 나에게 대답할 길이 없어져도

쓸쓸하지 않았다

생활무한(生活無限)

고난돌기(苦難突起)

백골의복(白骨衣服)

삼복염천거래(三伏炎天去來)

나의 시절은 태양 속에

나의 사랑도 태양 속에

일식(日蝕)을 하고

첩첩이 무서운 주야(晝夜)

애정은 나뭇잎처럼

기어코 떨어졌으면서

나의 손 우에서 신음한다

가야만 하는 사람의 이별을

기다리는 것처럼

생활은 열도(熱度)를 측량할 수 없고

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

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

애정지둔(愛情遲鈍)/김수영

 



'사랑' 생겼어도 고독한 상황

그러니 그가 '조용한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우습지 않은 사랑과 무섭지 않은 생활, 곧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평온한 삶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어려웠지요. 이 시를 좌절과 절망과 우울의 시간을 온몸으로 돌파하던 사람의 몸부림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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