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삶의미각

자살론/에밀 뒤르켐

uoooooc 2011. 4. 5. 12:22

 4층에서 창문의 오른쪽에 기대어  내려다보면, 아래로 뛰어내려도 전혀 사뿐하게 착지할 듯하다.
가까운 산허리에 자리잡은  그 흰색 복층집은 2억 이상이라는데, '1억은 커녕 ...'
난 그 집을 오래 쳐다보다가,  다시 풀밭이 내려다 보이는 창문 아래에 시선을 두다가
생각보다 좋은 집은 아닌 것 같다라고 그들과 내게 말을 해 주었다. 

고흐는 왜 귀를 잘랐어요?  그들 중 한 명이 묻는다. 그것은 아마도 욱하는 그 순간을 참지 못해서 일거야, 그 욱하는 이유는 고흐 자신만이 알거야. 까마귀 떼가 나는 밀밭에서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그 곳을 찾은 그는 왜 배에다 총을 겨누었을까? 아마도 죽고싶기도 하고 죽고싶지 않기도 해서 일꺼야. 정말로 죽을 작정이었다면, 입안이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겠지.  집까지 잔뜩 웅크리고 걸어 들어가던 그는 누군가 자기를 봐 주길 바랐을까? 고독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결핍과 고독.
테오가 곁에 있었다면 그가 죽었을까?  
한 해 이삼백명의 우리 나라 대학생들이 자살을 한다고 한다. 얼마 전의 뉴스이지만, 주로 생활고 때문이라는군. 
그리고 학비, 경제난? 최근의 카이스트 애들이 자살한 이유도 궁극적으론 결핍과 고독인게다. 
얼마전 이 곳의 남고 이 곳 저곳에서도 뛰어내렸단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얘기들로 종종 등장하는 안락사,  최근의 소식에 의하면 84세 할머니가 70대 의사에게 안락사를 통한 자살을 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준 칠십대 의사의 '삶을 생각하는 눈'. 종교나 절대자를 아는 자들은 용납이 되지 않겠으나 살아 있음이 죽음보다 견딜 수 없었음, 가치 비교를 했을때 자살을 선택하게 하는 그것.  문득 흠칫하여 이 이야기를 멈추었다. 듣는 이에 따라, 감상적이든 이성적이든 이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에 대해, 묽디 묽은 피를 가진 그들에게  이유없는 중얼거림을 만들어 줄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멈춘다.  

며칠 전 거리에서 자살론이란 책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이 작가이지 않을까. 그가 권장한 도서에 대해 아래의 글을 스크랩, 읽으며 감을 잡아본다.
역시 coming soon

통영에는 예술인들이 많다. 많지.
천재 운운.
천재는 요물스럽다.
미치게 하고 환장하게 하니깐.

 -아래-

   에밀 뒤르켐은 프랑스의 에피날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를 졸업하고, 중 ·고등학교에 서 교편을 잡은 후 독일에 유학, 1887년 보르도대학을 거쳐 파리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육학을 강의하였다. 칼 마르크스가 종합적인 사회학자라면 에밀 뒤르켐은 본격적인 사회학자라고 볼 수 있다. 뒤르켕학파로 불리는 거대한 사회학의 한 학파를 형성하여 세계의 사회학계를 이끌었던 것이다.

  뒤르켐의 자살론에 의하면 자살은 전체로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로 독자적인 특성, 즉 사회적 특성을 갖는다. 자살은 사회집단의 통합과 유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자살의 현상은 개인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한 사회의 자살의 경향은 사회적 사실로서 사회통합이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종교를 통해 개인이 집단생활에 긴밀히 통합되는 가톨릭교도들 사이에는 자살률이 낮으며 반대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를 가운데는 자살률이 높다. 또한 가족 간에도 친밀도가 높은 경우는 자살률이 낮다. 가족이 와해된 경우 상대적으로 자살률이 높다. 국가와 정치사회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회 통합이 강조되고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참여가 활발해지는 때는 자살률이 감소된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서 오히려 자살률이 감소했던 통계자료가 입증한다. 이에 따라 자살은 개별적인 이유만으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사회적 요인인 사회통합도와 자살률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 자살의 유형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즉 이기적 자살, 이타(利他)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과 숙명적 자살이 있다. 이 중 이기적 자살은 사회적인 통합성이 약화될 때 개인의 판단이 우선한 자살형태인 것이다. 이에 비해서 이타적 자살은 덴마크병사의 자살이나 전체주의 하의 자살공격대와 민주화 열사들이나 독립투사들이 그 전형이 된다. 말하자면 덴마크 병사의 자살은 늙고 병들어서 조직과 집단에 부담을 주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자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도 있다. 저 낙화암에 빠져 죽었다는 백제(百濟)의 삼천궁녀 이야기다. 패망 하는 나라의 궁녀로서 적군에게 잡혀서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살이고, 임진왜란 때 적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죽음 또한 이타적 자살이 아닌가.

  여기서 나아가 사회규제(規制)의 정도에 따른 자살을 보자면 숙명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을 들 수 있다. 숙명적 자살은 사회의 규제가 과도할 때 나타나는 자살이라고 볼 수 있는데 노예제도 하에서 도저히 삶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다. 이때 일어나는 자살의 형태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아노미적 자살인데 이는 무규범상태에서 저지르는 자살을 말한다. 가장 비사회적인 남녀 간의 사랑 즉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남녀 간의 연애에서 실연을 당하여 한 자살일지라도 성, 사랑, 애로티시즘의 현상으로서의 사회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 중략 -

     위의 여러 가지 자살의 유형에서 보듯이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살을 두고도 그 의미와 시사점이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그런데 무엇에나 시간성이 있는 법.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진 자살과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 행복전도사 최윤희씨의 자살에 대한 반응은 ‘아니, 그렇게 행복에 대해서 떠들던 사람이 자살을 해?’ 이처럼 반응은 애도하기 이전에 허탈한 쪽으로 표출되고 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고, 죽음 자체를 불행이라 여겨서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

  그러나 견딜 수 있을 때까지는 그렇다 쳐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시점에서 생(生)을 마감하는 일을 스스로 결행했다고 해서 이것이 비난만 받을 일인가.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가톨릭이나 유대교신자들에게서 자살(自殺)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고 했다. 생명은 신(神)의 영역이고 인간은 이 신의 영역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과 신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가치 해석을 다르게 하고 또 그 가치에 대해 주입된 논리가 절대 진리가 아님을 증명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수는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복(福) 중에 하나로 일컬어왔다. 이런 절대가치 속에서 어느 날 자기 생(生)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이름 하여 자살이라면 자살은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느 개인에 있어서는 최고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

  ( 유명 여배우로서의 남편이라는 꼬리표만 붙었지 인생에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기에 그의 부모들은 이들의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조성민씨는 ‘이 여자가 아니면 죽겠다.’고 수면제를 두병이나 털어 넣고 벌인 사투의 결과 결혼을 했지만, 결국 부모들의 염려가 사실이 되었다. 조성민씨 부모쪽에서 보면 최진실씨와의 결혼에서 아들에겐 뭐하나 제대로 된것이 없다. 이 사회는 도 아니면 모라는, 백이 아니면 흑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가 너무 횡횡한다. 이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

  우리 사회의 이러한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살론>: 도덕과 사회라는 주제를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살과 관련하여 성찰해야되지 싶다. 심히 도를 더해가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남을 매도행위와 어느 한 사람을 삽시간에 죽일 놈을 만드는 광기는 또다른 아노미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밭에 거름이 뿌려지듯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양극화의 독소가 빠르게 뿌려지고 있다. 이 독소를 먹고 아노미, 즉 무규범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사회의 이기적 현상을 치유하는 혁신이 일어나야겠다. 그것은 도덕과 정직성이다. 이 도덕과 정직성을 바탕으로 경제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분열보다는 연대로 가야하고 사회공동체적 삶을 뿌리내리게 하여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치유해야 한다.

       -  탱큐 엘자 -

쇼펜하우어의 자살론에 등장하는 내용 - 백합향기를 맡으며 자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