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네시간 흘러 넘치고 있다
1. 다가오는 氣運.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득차서, 만물이 자라는 힘의 근원. 살아 움직이는 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현상.
어떤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분위기를 사전적 의미로 기운이라고 하는데. 존재를 감아오는 이 묘한 기운감.
날마다 꾸는 꿈이었다.
그저께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생생함. 밀려오는 충만함과 정신의 온기, 편안함.
어제 어침에 눈을 떴을 때 다소 불안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런 일상같은 기억.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시간이라는 우주적 환영 속에 일정한 방향이 아닌 무차원적인 시공간에 부영하는 이 충만감.
내가 가거나 그들이 오거나 늘 좋은 기운으로 다가오는 기이한 기운으로 영혼이 환하고 벅차다. 仙堺에 있어야 할 種.
그저께 아침에도 , 어제 아침에도, 오늘 아침에도 그리고 지금 이 시각까지 두터운 연무와 가느다란 비와 빗소리와
이마가 서늘해지게 하는 냉기 속에서 생각들이 스물 네시간 흘러 넘치고 있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있는 일도 흘러 넘치고 있다.
아침에 커피. 한 시간 후에 커피. 점심 먹고 커피... 4층으로.
2. 퇴근 시각, 이 시간까지 비는 그치지 않고, 운무가 낀듯 재색 공기 속에서 기분좋은 소란스러움은 계속 되어지고 있다.
최갑수님의 책 세권이 배달되어 왔고, 김태정, 윤광준님의 책은 점심 시간에 손에 넣었다.
3. 책상 위의 책들의 제목과 내장을 대략 살펴보고 다시 들어와야할 듯하여 대부분 자리에 펼쳐 놓은 채 일어선다.
오후 5시 30분,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어둠은 짙게 깔렸지만, 먼 하늘엔 감청색이 언뜻 보이는 시간.
사회 구조속에서 그 곳에 가야할 사람들이라고 어른께선 생각했겠지만, 그들은 그래야할 이유가 없다.
내 경우 그분과의 인간적 의리외에 이젠 어느정도 인격적인 심성을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일체의 사적 볼 일을 접고 따라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 분은 왜 그래야 했는지.
예술이랄지 작가에 대한 공개적이고 과한 마음씀씀이는, 평범한 부류의 구조 속에서는 부담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빗물에 젖은 우산을 접어 검은 차에 밀어넣고 실려갔다.
와이퍼가 앞창 유리를 닦으며 뿌연 시야를 헤집어 주었고 빗물에 번들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네온이 노란빛으로 흔들렸다.
비에 젖은 붉은 벽돌 건물의 예술관에 도착하고, 곁길에 주차하고, 우산을 각자 쓰고 2차선을 뛰다시피 횡단하고,
어제 이후 두 번째로 상가내의 시골밥상집을 방문하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옛스런 상가가 오랫만이라는 둥.
과메기. 땅콩버무림. 삶은 오징어 회무침, 노란 배추속, 된장, 배추지짐, 홍합이 든 배추된장국, 붉은 빛이 풍부한 김치, 콩나물무침, 튀김고등어 2마리, 도토리 묵, 각자의 간장 종지, 따뜻한 하얀 밥그릇... 어제의 회식에서는 굴이 나왔는데, 오늘은 떨어졌단다. 통영굴이라고 하신다. 어제는 사람들 중에서 많이 맛있게 먹었기에 그들로부터 별명을 얻기도 했다. '도대체 그렇게 많이 먹고도 살이 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 ' 머리로!' , 나는 불량돼지. 입에 맞으면 두 그릇을 먹었지만, 오늘은 시간이 촉박하여20여분 만에 식사를 끝냈다. 도계에서 5개를 얻었다고 하는 감홍시를 두 개 내 놓으셨는데, 한 개씩 먹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홍시를 가장 좋아한단다. '나두요. '
커피 생략, 그 방면으로 프로 정신을 가진 시골밥집 아주머니는, 친절하고 정성을 다하여 배웅하신다.
전시관으로 가다가 지인을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기분좋은 대화들을 주고받고, 나오다가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화분을 발견했다. 그것은 어른께서 어제 보내 주신 것이라고 한다. 내가 안에 들어갈 수 있을만큼 키가 커다랗고 풍성한 잎들을 가지고 있었다. 래드의 공간에 그림처럼 비껴 앉아 있을 때, 창가에서 배경이 되어 서 있던 그 나무와 똑 같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혀 래드의 나무를 얼마나 올려다보았던지. 바라만 볼뿐이었는데 똑 같은 나무가 내게 온 것이다.
사람들과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고 한 칸 건너, 음악회장으로 갔다. 조명이 가득한 무대와 갖춰진 무대복과 화장과 성장. 정성껏 차려 입은 사람들의 관람 태도, 그리고 일시에 터지는 박수, 앵콜, 커턴콜, 감상자와 표현자가 공존하는 공간에 음악이라고 불리는 소리들. 그림? 대체로 소리가 없는 적막한 공간, 액자라는 옷에 따라 달라져 보이는 그림, 장비가 많고 과정이 길고 공간이 필요하고 끊어지지 않을 돈이 있어야하고. 아아, 일차 이차 계속 이어지는 과정상의 고단함에 벌써 정신이 지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그리고 있다. 생각컨데, 음악과 그림과 글은 표현 양상이 다르다.
다르다고 하니 생각나는 것 하나, 첫날이었다. 빨간 목단에 검은제비꼬리 나비 한마리가 있는 그림을 보고 세 사람이 곁에 와서 질문을 한다. 그 중에 한가지. ['목단에는 향기가 없는데 나비가 그려져 있노요? 향기없는 붉은 목단에 검은 나비의 존재는 역설적 표현이고 그림에서 화가는 지식의 패턴으로 자유로와야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나비만 인식을 했는데 수개월 전부터 어떤 계기로 나방을 생각하고 염두에 두기 시작했어요. 차이가 뭐지요? 나비는 낮, 나방은 밤, 나비는 향기, 나방은 달, 나비는 양기, 나방은 음기, 나비는 날개를 접어서 앉고 나방은 날개를 접지 못합니다. 나방은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는데, 나방은 죽을 줄도 모르고 달을 향하듯 온갖 종류의 불빛을 향해 몸을 던집니다. 두 개의 사물을 비교하여 화제를 한 번 다루어 보시죠. 그외에. ] 그리고 묵화로 눈길을 옮긴다. 먹물의 목단꽃은 내 미련한 시간의 기록이다.
음악관의 뒷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가끔 필요한 장면에서 기록용 사진들을 찍어 주기도 하고 눈을 감기도 하고 그들의 음악은 마치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흘려들었다. 2시간의 공연이 끝난 후, 지인들과의 인사 나눔, 기념촬영, 꽃다발 증정 등등, 중략... 9시 40분 다시 제 자리로 도착. 나무, 나무를 제게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그리고 주차장소로 가는 도중에 불빛이 환한 건물의 내부가 궁금해서 우산을 든 채 창문을 두드렸다. 밖은 캄캄하고 비는 여전히 내린다. 공간이 잠시 하얗다.
빠르게 흐른다. 이렇게 스물 네시간 넘쳐 흐르고 있다. 그래서 못견디게 아름다운 나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