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진가

그 그리고.. 또 그

uoooooc 2012. 6. 19. 04:48

 

 

1. ( 모 뉴스에서 부분 발췌함 )

' 사진작가

 1957 ~ 2005. 5. 29. ( 충남 부여~제주 ) 

1985년 제주에 정착 이후 그는 카메라 하나 메고 온 섬을 누비며

들과 구름, 산과 바다, 나무와 억새 등의 자연 풍경을 소재로 많은 사진 작품을 남겼다.

1999년 루게릭(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란 진단을 받았으나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2002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삼달초등학교 분교를 임대하여 개조한 뒤 갤러리를 개관, 운영해 왔다.

그는 2004년에 펴낸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책에서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통해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고 할 정도로 제주의 자연을 사랑함.

그동안 17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마라도〉·〈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 등 사진집과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등 자전 에세이집 등을 펴냈다.

생전에 전시회에 누구를 초대하거나 사진을 팔 생각을 하지 않는 등 시속에 타협하지 않는 철저한 야생인으로 살았다.

2004년 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던 '내가 본 이어도'를 마지막 사진전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함.

유골은 갤러리 앞마당 감나무 아래에 뿌려지고

현재 갤러리 두모악에는, 밥값으로 필름을 사고 냉수로 허기를 달래며 찍은 20만여 장의 사진작품이 전시돼 있다. '

 

 

 

 

 

 

2. (블러그 '소나무집에서' 부분 발췌함 )

' 제주 출신도 아니면서 제주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을 찍은 사람.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세상과 타협할 줄을 몰라서, 

자신이 찍은 사진에 대해 너무 냉정해서,

 너무 외롭고 너무 가난해서,

그리고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분교의 감나무 아래 그의 유골

 

 

 

그의 서재와 그의 카메라

 

 

 

분교 內 그의 갤러리

 

 

 

그의 작품들 중에서

 

 

 

그의 갤러리, 무인 계산 찻집

 

 

 

그의 갤러리 內 어느 곳, 남과 여

 

 

 

3.  출처 ( 진동선: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장)

 

 ' 한 사진가가 있었다. 사진이 삶의 전부였고 사진을 떠난 삶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진가가 있었다.

2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사진의 열정을 불태우다 바람처럼 사라져간

우리는 그를 바람의 사진가로 기억한다. 평생 바람과 마주했던 사진가, 바람을 떠나 삶을 말할 수 없고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사진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진가였다.

때문에 그의 사진 앞에서는 그가 20년 동안 바람 앞에 섰던 삶의 정황들과, 바람의 의미와, 그 바람의 실체에 대해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를 만들고, 그의 사진을 만들고, 그를 데려간 것은 바람이었다. 도처에 바람이 인다.

한 사진가의 청춘을 사로잡은 바람.

한 사진가의 영혼을 빼앗은 바람.

그 바람과 마주한다.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를 놓아주지 않았던 바람의 정체는 무엇이던가.

 

뭍에서 사진해도 좋았을 것을 왜,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을까.

척박한 섬에서 고단한 사진의 길을 걸으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녕 바람 때문인가.

정녕 바람을 찍고 싶어서인가.

그가 만나고 싶었던 바람, 그가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바람. 

바람은 미완성이다. 애초부터 완결지을 수 없는 미완의 모습이다.

그는 무모했는가.

아니다. 완결될 수 없는 미완의 프로젝트이기에 도전할 가치가 있었고, 또 그것이 삶이고 역사였기 때문에 예술혼을 걸 만했다.

 

그가 20년 동안 매달린 바람의 형상.

진정 그토록 찾았던 바람, 그토록 표현하고 싶었던 바람의 모습이 저것인가.

영혼을 빼앗겨본 적이 없는 자가 어찌 바라볼 수 있겠는가.

 

고독했다.

아니 절망했다.

뭍에서 건너온 여느 작가들처럼 그도 풍광 좋고, 예쁘고, 사진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좀 더 일찍 유명해졌을 것이고, 삶도 훨씬 더 풍요로웠을 것이다.

또 바람에 영혼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유명세와 행복함을 뒤로 하고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장소, 같은 대상, 멋질 것 없는 중산간 들판을 어슬렁거렸다.

바람 때문에,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바람 때문에 그렇게 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토록 잊지 못했던 그의 둔지오름. 삶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이곳을 그리워했다. 눈만 감으면 떠오른 그리움의 풍경이라고 했다. 

아쉬움과 연민의 풍경 그곳. 고요하고 적막하고 평화롭다.

그가 사랑했던 길. 늘 아꼈던 길이고 늘 마음에 담았던 길.  아름다운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풍경.

 

그의 사진이 그런 말을 한다.

평범하고 소박한 풍경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풍경이라고. 생명을 주는 호흡이 뭐 특별할 게 있느냐고. 

사진도 삶처럼,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수용되고 오랫동안 품에 안겨지는 사진이 된다.

사진을 사진답게 하는 것은 자연성이다. 미학의 정토. 풍경을 만든 삶, 삶을 만든 풍경을 꿰뚫는 것이 사진의 철학이다.

철학만이 진정한 사진을 만들고, 삶을 수용하는 사진만이 미학이 될 수 있다.

 

이 바람 속에서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너른 대지가 꿈꾸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존재감이다. 평범함과 소담함,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것, 삶이 존재이고, 존재가 삶이 되는 존재성이다. 

마지막 삶 앞에서 그가 둔지 오름을 사랑한 것도, 그리워하고 잊지 못한 것도 존재의 위대함이다.

특별할 것도, 멋질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둔지 오름의 존재에서 그는 은은한 황홀감을 맛보았다.

 

 

 

 

그의 사진에서 바람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곳은 그래서 들판이다. 그는 들판에서 바람의 존재를 깨닫는다.

은은한 황홀에 빠진 곳이 둔지봉 들판이다. 그곳에서 살아 있는 생명과 계절감을 맛본다. 중산간 들판에 부는 바람은 계절의 존재감이다.

 철따라 달라지는 작물들, 그것을 일구는 농부들의 모습은 자연성이다. 들판은 오감을 열게 한다.

중산간 들판을 휘몰아친 바람의 속살이 바로 자연성이다.

 

풍경을 찍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바람을 그저 마음에 담으려 했다.

일 년 열두 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중산간 들판을 찾고 돌담이나 나무 그늘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하늘, 땅, 나무, 풀, 돌 등을 바라보았다.

 

둔지봉을 넘어온 바람은 너른 지평을 휘몰아친다. 그곳에 키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어디를 봐도 우람한 데 없고 어디를 봐도 빼어난 곳이 없다.

바람맞이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작고 작은 평범한 소나무.

소재로서도 어울리지 않고, 대상으로서도 뛰어남이 없는 밭고랑의 소나무이다.

그것들에 그는 아주 오랫동안 눈길을 주었다.

전적으로 바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의 애잔함 때문이었다.

 

사진은 말한다. 하찮음 속에 존재의 깊이가 있다고. 또 하찮음 속에 존재의 저마다 삶의 아픔이. 

들판의 소나무들.

들판의 소나무들이 삶을 버텨내는 의지의 형상으로 보였다.

그래서 불현듯 가슴이 뭉클해지고, 순간 자신에게 찾아온 자연의 위대한 메시지로 수용한다.

삶을 버텨내는 의지의 소나무에서.

 

하찮음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존재들의 삶의 의미를 보고, 그리고 위대한 자연성을 껴안는다.

사진에서 그것들은 미세한 시간의 균열과 간극으로 나타난다. 또 간극 사이로 흡입하는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로서 자리한다.

삶을 만드는 풍경, 풍경을 만드는 삶을 헤아리는 미학적 정토이다.

“삽시간의 황홀”은 하찮은 존재들이 순간 위대한 존재감으로 나타나는 미적 섬광이다.

 

들판은 바람의 모습이다. 바람을 따라 들판을 배회한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주를 볼 수 없고, 바람을 모르고서는 한 발짝도 사진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 들판의 소나무가 그가 표상하려 했던 바람의 실체인가. 저 소나무들이 사진 속의 소나무들인가.

고개를 돌려 오랫동안 애착을 주었다는 작은 소나무에 눈길을 준다.

그곳에 바람이 인다. 그가 말한 “내 안에서 부는” 존재의 바람이다.

 

들판의 바람은 되돌려지는 시선 속에 있었다. 존재를 보게 하고, 존재의 삶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시선의 되돌려짐이다.

내 안의 바람은 소나무의 시련이 존재의 시련으로 되돌려지는 시선이고, 

고독하게 선 나무의 존재를 헤아리게 하고, 별나지 않은 나무 한 그루의 삶이 얼마나 유장한가.

 

그의 사진에서 오름은 풍광이 아니다. 제주 사람에게 오름은 늘 거기에 있는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랬기에 그도 매일 오름을 오르고, 오름과 대화하고, 오름과 더불어 살았다.

오름은 그에게 사진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대상이었다.

 

오름에 바람이 실어온 빛이 있었다. 빛은 바람이 만들었다.

그래서 바람을 볼 수 있는 자만이 빛을 볼 수 있었고, 빛을 볼 수 있는 자만이 오름을 볼 수 있었다.

하늘과 땅이 오름을 통해서 맞닿았다. 그에게 오름은 땅이면서 동시에 하늘이었다.

오름에 그는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혔다. 사진을 위해 영혼을 건넨 것이다. 오름에 그는 삶을 던졌다.

 

오름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빛과 그림자였다. 오름에서 빛과 그림자는 하나이다.

오름에서 발과 눈이 하나이듯이 하늘과 땅은 하나이다.

용눈이오름이 빛이라면 다랑쉬오름은 그림자였고, 다랑쉬오름이 빛이었다면 용눈이오름은 그림자였다.

인간과 오름의 동질성을 그는 오름의 빛과 그림자에서 찾으려 했다.

 

오름은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의 풍경으로 나타났다.

계절에 따라, 기상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존재의 풍경으로 나타났다.

그가 말한 “삽시간의 황홀”은 그것이다.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름에 올랐다.

앉아서도 보고, 서서도 보고, 누워서 보았다.

그래야만 보였고, 그렇게 보아야 담을 수 있었다.

오름에 취하고, 오름에 빠지면 각박한 삶도, 어지러운 세상도 보이지 않았다.

오름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화와 자정의 형상이었다.

 

 

 

구름

 

 

 

바람은 구름을 일으킨다. 바람을 타고 오는 것이 구름이다. 구름은 살아 있는 것들의 덧없음이다. 또 생의 아스라함이다.

그는 구름에서 사라짐의 의미를 보았다. 그때부터 구름이 풍경의 중심이 되었다.

구름을 마지막으로 돌린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의 애잔함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구름은 이미지로 남는다.

존재의 덧없음은 곧 이미지이다.

 

구름은 하늘의 모습이었다. 들판이 땅을 상징하고, 오름이 하늘과 땅을 상징했다면, 구름은 공화(空花), 즉 덧없음의 하늘이었다.

구름은 선도, 형도, 면도 없다. 빛도, 색도, 그림자도 없다. 모든 것이 부정형이며, 모든 것이 예정되지 않는 순간의 형상이다.

그런 구름을 들판에서, 오름에서, 길가에서 심지어 밭담과 나무 사이에서 보았다.

어떤 날에는 구름을 따라가고, 어떤 날에는 구름을 떠나보내고 돌아왔다. 구름은 영혼의 자국이었다.

 

그의 사진 인생 20년. 그것들이 어떻게 한 사진가의 지난한 삶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인가.

또 그것들이 어떻게 사진과 맞바꾼 영혼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인가. 

질긴 삶의 피로를 사진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가.

그렇기에는 지난 삶이 너무 쓰라리다. 한 사진가가 평생을 마주했던 삶의 정황은 사진으로 채우기에 역부족이다.

그 인들 몰랐을까.

 

나무는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그.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서 있는 나무가 어찌 열매에 집착할 수 있는가.

이것이 그의 사진 철학이다.

죽음 직전까지 그는 자신이 겪은 고생은 행복이었다고 말한다. 고단했던 삶이 오히려 편안했다고 말한다.

또 누구로부터 눈길을 받지 못한 때가 더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행복이다. 살아서는 채울 수 없는 절반의 행복이다.

 

마지막 삶의 언저리에서 그는 반짝 매스컴으로부터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되찾은 절반의 행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순수성과 예술혼을 오염시켰을지 모른다.

또 그런 일들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지 모른다.

 

아주 짧은 시간 그를 본 적이 있다. 또 아주 짧은 시간에 그가 영혼을 던진 사진의 무대를 밟았다.

때문에 그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사진 세계를 말하려 한 것은 한 사진가의 20년의 세월과, 그 세월 동안 일궈낸 사진들과,

그 속에 담긴 예술혼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평론가로서 한 사진가의 지난했던 삶을 일찍 헤아리지 못한 후회, 아쉬움, 안타까움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땅에 그런 사진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적 관점에서 말하고 싶다.

사후 일 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되는 사진집의 의의는 그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아니 작가는 생의 존재 이유를 작품집에서 찾는다.

 

이 사진집이 그라는 사진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또 그가 걸어온 지난 20년 사진 세계를 바라보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잃어버린 그의 절반의 행복을 되찾아주는 일이거니와

작가는 죽어서 평가받는다는 미술사의 오랜 진리를 복원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어도를 본 사람은 반드시 미친다'는 속설처럼, 그는 이어도를 훔쳐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아플 때의 쓸쓸하고 황량한 모습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 

 

 

 

 4. ( 부분 발췌함 / 오마이뉴스)

 

그는 제주의 풍광을 너무도 사랑했던 사진작가다. 그는 어느 날 제주에 홀려 가족과 연인들을 뒤로하고 스스로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는 철저히 제주가 되려 했지만, 그때마다 철저히 '육짓것'이 되었다. 주민의 신고로 공안당국에서 수사를 받기도 했고,

세 들어 사는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제주의 바람, 오름, 노루, 나무 등 제주의 자연만이 그의 친구가 되었을 뿐이다.

 

그는 필름만을 생각하며 순간의 황홀을 찾아 "바람을 안고 섬을 떠돌아다녔다."

쌀은 떨어져도 슬프지 않았지만, 필름이 떨어질 때는 처절하게 절망했다.

필름을 구하기 위해 막일을 하며 세상의 벽 앞과 마주서기도 했다.

 

그러다가 삼달리에 폐교를 고쳐 갤러리를 열었다.  

축사에서 곰팡이의 서식지가 되어 썪어가는 사진들이 안쓰러워 안식처를 구해주기 위함이었다. 

시골에 누가 사진을 보러 오겠냐는 주변의 회의적인 전망에도 사람들이 갤러리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병이 찾아왔다. 루게릭병, 서서히 근육이 마비되다 고통가운데 생을 마감하는 불치의 병이다.

치료를 시도할 때마다 고통과 절망을 되돌려 받았다. 형제들은 작품을 내려놓고 치료를 권했지만 그는 질병과 화해하고 평화를 찾으려 했다.

 

"이어도를 훔쳐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사람"

 

병마와 공존한지 6년이 되는 2005년 5월에 그는 형제들의 슬픔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분신처럼 아끼던 작품들과 갤러리 두모악이 유족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아래는 제주 지역 화가와의 대담 중에서)

 

'작품과 삶이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은 곧 그이고, 그의 삶이 곧 작품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심상을 반영합니다. 풍경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작가의 마음인 것이죠.

오름 앞에 나무가 서있는 사진인데,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세상이라는 허허벌판위에 서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나무를 찍었지만, 저는 작품 속에서 나무가 아니라 그를 보게 되는 겁니다."

 

제주에서의 그의 삶이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늘 밥벌이도 못하고 결혼도 못한 무능한 사람이란 눈총을 받았다.

작품 속에 나무가 그라면, 제주섬은 그에게 황량한 벌판이었을까?

 

"그에게 제주도는 바람이라고 봅니다. 나태할 수 없도록 예술혼을 일깨우고 영감을 불어넣는 바람.

제주도는 그의 마음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 선정된 겁니다. 

그는 제주가 가지고 있는 풍광뿐만 아니라 변방이 지닌 아픈 역사에 매료된 것이라고 봅니다.

제주는 '육지 사람들'이 적응하기엔 힘든 면이 많은 곳입니다. 책에도 '육짓것'에 대한언급이 많은데,

그만큼 낯선 일에 대한 경계심,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마음의 벽을 넘어서서 주민들과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어요."

 

 

"그에게 제주는 예술 혼을 흔드는 바람"

 

그는 스스로 제주에 유배되었고, 스스로 세상의 것들로부터 유폐되었다.

스스로 고통을 자처했고, 그러면서도 고통과 싸우며 화해했다.

범인들은 감내는 고사하고 이해도 하기 어려운 삶이다.

 

"사실 모든 예술가들이 고통스럽죠. 그런데 그의 삶은 예술가들의 숙명을 스스로 고통과 화해했다는 점에서 예술가들의 표본이라 할 만합니다.

그는 작품을 할 당시에는 배고프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누구든 몰입하면 잠시 고통을 잊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몰입이 그에게는 일상화되었어요.

그것도 여기서 죽어도 좋을 만큼의 몰입, 그때의 희열을 느끼며 버틴 겁니다. "

 

그는 늘 혼자였다. 형제들로부터도, 연인으로부터도 스스로 벗어나려했다.

그의 삶은 자유롭지만 늘 외로웠다.

그에겐 사진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바가지를 완전히 비워야 물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비워냈던 겁니다.

그런데 작품을 할 수밖에 없도록 삶을 맞춰가는 포석이 완벽했어요.

그의 작품과 이 갤러리는 사진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든 포석의 결실이라고 봐요."

 

그는 떠나고 우리 곁엔 그의 사진들만 남아 있다. 

그림과 책으로만 그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 여류화가의 눈빛을 통해서도 그를 읽을 수 있었다.

 

 

5.   ( 발췌 : 김종성기자/오마이뉴스 )

이 책은 저자의 나이 47세 때 걸린, 근육을 점점 쓸 수 없게 되는 고약한 난치병 루게릭 병과 싸우면서 쓴 자신의 자화상과 같은 책이다.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제주 중산간 들녘의 사진들을 보면, 그래서 감탄과 슬픔의 두 감정이 교차하기도 한다.외로움과 평화를 찍는 사진가 .

 

"마음이 평온할 때면 나는 그 들판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산다는 일이 싱거워지고 마음이 불편해져야 그 들판을 생각합니다. 그래도 들판은 즐거운 축제의 무대를 어김없이 펼쳐줍니다.

들판을 만나고 오는 날에는 잠자리가 편안합니다." (본문 가운데)

 

작년에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떠났을 때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닷가를 달리다가 우연히 제주의 속살이라는 내륙의 중산간 길에 들어선 적이 있었다.

바다와 달리 들판은 그 위를 직접 달려갈 수 있어서 그런지 무척 이채로운 기분이 들고

중산간녘 들판에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위에 느낌이 저마다 다른 크고 작은 오름들이 솟아 있고

신령스럽게 들려오는 까마귀들을 울음소리, 부는 바람에 억새들이 춤추는 원초적인 풍경.

 

이렇게 한껏 평화로운 들판의 풍경은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깊은 외로움을 전해주기도 한다.

평화와 외로움, 전혀 다른 느낌의 말이지만 저자에겐 숙명과도 같은 대상이요 사진재료가 되었다.

외롭고 허무한 세상살이를 잊기 위해 그는 미친 듯이 사진 하나에만 몰입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사진을 찍는 하루하루는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그런 저자를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처음에 진정한 자유는 혼자일 때만 가능하다는 생각에 섬 속의 섬 마라도에서 혼자 지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을 견디기 힘들었으며 그 후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체념했단다.

 

그가 찾던 파랑새는 무엇이었을까!

"이십여 년 동안 사진에만 몰입하며 내가 발견한 것은 '이어도'다. 제주 사람들의 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이어도를 나는 보았다.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호흡 곤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 나는 이어도를 만나곤 한다." (본문 가운데)

"밥벌이 안 되는 일을 언제까지 할꺼꽈? 시내 나강 사진관 하믄 돈 벌 텐데.

모두들 떠나지 못행 안달인 촌구석이 무사 좋앙 눌러앉앙 살암신지 이해하지 못하꾸다."

제주도에 이사를 와 살게 되면서 저자가 동네 사람들에게 주로 듣던 동정과 타박이 섞인 말이다.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꿍쳐둔 돈을 톡톡 털어 제주에서 일 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가졌다.

아마도 과시나 누구를 위한 전시회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 게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하면서도 동이 트기 전 20킬로그램이 넘는 사진 장비를 둘러메고 온종일 들녘을 해매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선 새벽까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생활을 이십 년 넘게 반복하다가

결국엔 치명적인 병까지 얻어가면서 과연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춥고 배고팠던 나머지 그때는 몰랐다고 저자는 말한다. 파랑새를 품 안에 끌어안고도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단다.

등에 업은 아기를 삼 년이나 찾아다녔다는 노파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낙원이요, 내가 숨쉬고 있는 현재가 이어도라 한다.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밑 빠진 독에 물 채우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정신 나갔다고 혀를 찬다. 그래도 나는 웃는다.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밥벌이도 못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웃는다. 그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뭐했냐고 다그쳐도 웃는다.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섬에서 나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뭍의 것들이기에 일상적인 풍경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내 사진에 표현하고 싶은 주제(마음)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문 가운데)

시인들이 일상의 평범한 언어와 이야기들로 시를 창작하여 새롭게 승화시키듯,

그도 눈에 익숙해진 평범한 풍경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오랜 시간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사진이 제주를 담은 다른 사진들과 무언가 달라지게 된 계기는 바로 그 섬에 사는 사람들 덕이었다.

 

들에서 밭에서 바다에서.. 섬사람들의 토박이들의 고된 삶을 경험하기도 하며 가까이에서 보니

그들을 통해 저자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형편없고 가치 없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만만하게 세상과 삶에 대해 떠벌렸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사진 속에 더욱 몰입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저자는 제주도의 유명인이나 예술가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노인들과 지내는 시간이 더 좋았다.

제주 사람들의 삶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질수록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카메라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그의 마음을 달아오르게 했다.

제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무덤이 보이고 동자석이 보였다.

토박이들이 꿈꾸었던 '이어도'라는 유토피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 실마리가 될 무덤을 찍다가 장례식과 굿판을 기웃거리게 되고 오름들을 만났다.

저자가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보다

바람 부는 중산간 들녘의 초원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교회나 절, 성당을 찾아가 회개하고 기도하듯 그는 마라도, 중산간의 들판, 오름에 가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곳에만 가면 가슴속 응어리가 풀렸고,  그 곳이 삶을 깨닫게 해주는 경전이자 성지였다고.

 

 

 

 

 

                                                                                                                                                                                                                          2011.8.22